4. 필리핀의 종교
관리자 11-12-13 15:21 54

4. 필리핀의 종교

 

로만 카톨릭(83%), 프로테스탄트(개신교)(9%), 회교(5%), 이단집단(4%),

무신론자(1.5%), 불교(1.1%), 무속신앙(1%)

 

1) 스페인통치이전의 필리핀종교

스페인이 들어오기 이전의 필리핀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중심으로 한, 대단히 미신적 인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들은 신들 사이에도 등급과 종류가 있다고 믿었고 지고 신에 대한 개념과 먼저죽은 조상들과 함께 살게 된다는 사후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1) 지고신(Supreme God)  
이들의 지고신은 Bathala, Laon 또는 Kabunian등 종교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진다.이 신은 인간들이 다다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한 인간과는 판이하게 틀린 존재라고 여겨졌다.바로 이 지고신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한다고 믿었는데, 필리핀 사람들은 이 지고신의 뜻과 자신들이 지키는 관습을 동일시했다.  그러기에 관습을 범하는 것은 곧 신의 뜻에 거스르는 행위로 저주의 대상으로 여겼다.

(2) 조금 낮은 신   스페인 시대 이전의 필리핀 사람들은 지고신 밑에 Anito라고 불리는 조금 낮은 신들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이 신들은 인간의 일상사 즉 생과 사, , 전쟁의 승패, 기후, 농사, 인간관계, 가족과 마을의 안위, 고기잡이, 사냥 그리고 어려운 결정을 바르게 내릴 수 있는 정보제공 등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영적 존재들은 나무나 조각 또는 강에 사는 것으로 여겨졌다.  

필리핀 사람들은 수 만 가지의 신들이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고 그 신들을 조각으로 만들어 숭배했다 만약 이 신을 노엽게 하면 그 가족과 마을이 벌을 받게 됨으로 반드시 그 노여움을 풀어 주어야 했다.  여기에는 쌀, 과일, 코코넛 오일, 코코넛 술등이 예배의식 속의 제물로 쓰여졌으며, 이것을 드리면 화는 풀고 은혜(Panalangin) 를 회복시켜 준다고 믿었다. Anito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이러한 제사의식은 스페인시대 이전의 필리핀 사람들의 종교생활의 핵심이었다.  이 제사의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보통 Babayan, Baylanes Catalonan이라고 불리는 여자 무당에 의해서 행해졌다.

(3) 조상신   조상신은 후손을 돌보는 신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또한 부류의 영적 존재였다.   조상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면 살아있는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 신들은 지고신에게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 영적 존재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것으로 믿었으며 적의 조상신은 악마로 여겨져서 적대시하였다.

(4) 영적 힘을 지닌 존재들   스페인시대 이전의 필리핀 사람들은 그 외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적 존재들을 믿었다.  예를 들면 Wak Wak이라는 마녀는 자신의 몸을 상하로 분리할 수 있어서 상체는 밤에 식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잡아먹으러 다닌다고 믿었으며, Aswang이라는 마귀는 동물로 변해서 밤에 사람을 잡아먹으러 다니는 영적 존재로 믿었다. 이렇게 심술궂은 신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Anting-Anting 이라고 불리는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었다. 스페인 시대 이전의 필리핀 사람들이 믿었던 또 하나는 영적인 존재들은 자연 속에 거주한다는 것과 자연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영적 존재를 제어하는 것은 곧 자연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전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또한 제어해 보려고도 시도했다는 것이다.

(5) 사후세계   필리핀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고 있었다.  사후 세계는 현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세계로서 사후 세계에서 주어지는 자리는 생전의 도덕적인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그 사람이 생전에 차지했던 사회 경제적인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2). 스페인통치이후의 필리핀종교

1521년 마젤란이 씨부에 도착해서 이 땅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하면서부터 필리핀의 카톨릭 역사는 시작되었다.  스페인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카톨릭을 전했을 때 사용 했던 방법대포 로만 카톨릭은 필리핀의 전통적인 관습이 교회의 가르침과 크게 상치되 지 않으면 다 보존시키고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 스페인 신부들은 성인(成人)들이 세 례를 받기 위해서 지켜야 될 세 가지 요구조건을 내 걸었다.  첫째, 일부일처제를 지 킬 것. 둘째, 지나간 삶 속에서 지은 죄를 회개할 것.  셋째, 세례를 통한 구원을 믿을 것이었다.  초기의 스페인 신부들은 의식, 교리공부 등을 교회를 중심으로 실시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가정에서 행해지던 종교교육이 점차 교회로 옮겨지게 되었다.

(1) 두 종교의 서로 다른 강조점   필리핀 사람들이 믿고 있던 정령론도 세계의 창조, 인류의 시작, 신의 본성, 인간의 궁 극적 운명 등을 설명하는 신화론적 요소가 있었으나 이것이 주요관심사는 아니었으면 오히려 일상사에 대해서 더 많은 강조를 하였다.  당시의 정령론자들은 인간의 기원과 궁극적 운명에 관심 갖기보다는 오히려 농사나 사냥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고 로 당시의 정령론이 일상사에서는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한 반면 어떤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정령숭배자들은 일상사보다는 좀 더 초월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과 강조를 하는 새로운 종교를 맞이하게 되었다.  로만 카톨릭은 그 당시의 관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지고신에 대한 개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 사람들이 해야 했던 것은 지나 간 죄의 회개와 구원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뿐이었다.

(2) 민속적 카톨릭    필리핀의 식민화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1590년에는 전 국민의 거의 반이 세례를 받았 다. 그러나 신부들은 지금 이들이 갖고 있는 신앙은 정통 카톨릭이 아니라 카톨릭과 정령론이 혼합된 민속카톨릭(Folk Catholicism )이라고 말한다  하이메 불라타오 신부 는 필리핀 사람들은 두개의 조화되지 않는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필리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카톨릭이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가 그들이 믿는 것 과 제대로 조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두 종교의 공존   이 민속카톨릭을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데, 민속카톨릭이란 단순히 한 인격안에 두개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는 외면적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민 속 카톨릭이란 한 인격 안에 두개의 종교가 아무런 문제 또는 부조화 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민속카톨릭 안에 혼합된 로만 카톨릭이 인간의 어떤 궁극적 관심 사에 대해 말한다면 정령론은 매일 매일의 삶을 얘기한다. 로만 카톨릭은 필리핀 사람 들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는 것이 없다.  날씨, 고기잡이, 집터 고르기, 병자 치유 등에 대한 신학이 없다.  그러기에 필리핀 사람들은 자기네 고유종교에서 말하는 일상사에 관한 것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행하고 있으며 여기에 로만 카톨릭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4) 미신화된 로만 카톨릭   로만 카톨릭과 전통종교의 관심사가 틀리긴 하지만 두 종교의 의식 중 겹치는 것이 많 이 있다.  로만 카톨릭의 성상사용, 성수사용, 축복의식, 성인께 드리는 기도 등은 조 금만 변형시키면 전통종교의 틀에 아주 근사하게 들어맞는다.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들이 카톨릭의 수호성 인으로 대체되었다.

   십자가는 부적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종려나무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대문 위에 걸어두면 악령이 틈타지 못한다고 믿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버스, 지프니, 택 시에 마리아 상이나 어린 예수 상으로 구성된 작은 제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이들 이 아직까지 이러한 물건들이 안전한 여행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로만 카톨릭의 연옥교리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조상신에 대한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가장 많은 것 중의 하나이다.  죽은 조상신은 하늘나라로 가기 전까지 반드시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비극적으로 죽었거나 젊었을 때 죽었다면 그원혼을 잘 달래야 산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으로 전래 종교는 믿고 있다.

   퀴아포 성당의 검은 예수 상과 씨부의 어린 예수 상은 병자를 낫게 하고 악령을 막아 내는 능력을 소유한 성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 성상들이 그 힘을 다른 물체에도 전이시킬 수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손수건이나 천 등으로 그 상을 문질렀다가 병을 고칠 목적이나 재앙을 몰아내기 위해서 병자에게 주기도 하고 집으 로 가져오기도 한다. 1521년 마젤란이 씨부에 도착한 이래 지금까지 필리핀 사람들 은 민속 카톨릭을 믿어 왔다고 볼 수 있다.

(5)필리핀 종교개관 필리핀의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식민통치 영향으로 동서양이 교체되는 복 합문화형 태를 띄고 있으며 천주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천주 교 신자가 83.6%이나 다수가 전통무속종교 와 혼합되어 있으며 미신적인 신자들이다.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며 그중 5.2%가 열심히 있는 신자이다.

 

(6)필리핀 교회 현황 Philippine Crusade Inc. 에 의하면 19918월 현재 전국에 22,1888개의 교회가 있으 며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 교회가 2,815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실제 교회참석 인원은 평 균 58명으로 나타났다. 이 들은 개신교인의 비율을 5.2%로 집계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이들이 벌리고 있는 K.A.W.N. 2000 운동은 2000년 까 지 전국 5 만개의 동네에 적어도 한 교회를 세우자는 것인데 앞으로 도 23,752개의 교회가 더 필 요한 상태이다.

1899년 최초의 개신교 미국 선교사가 들어온 후 지급까지 필리핀 은 어느 나라보다 예 배하며 활동하기에 자유롭다. 2,000여명의 선교 사들이 방방곡곡에서 일하고 있으며 300며 개의 교단이 등록되어 있 고 드 결과 이미 굴직한 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도표 에서 보듯이 그러한 급성장은 80-90년 사이에 된 것을 알 수 있다. 70년까지만 해도 4,300여 교회이던 것이 80년에 13,600 교회 로 90년에 27,000교회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장한 교회들 도 주로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들로 집계되고 있다.

필리핀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이다. 자국내로 혹 은 외국으로 선교사로 이미 선교사를 내보내고 있다. D.A.W.N. 2000의 통계로는 Africa 3, Austria, 1, Bolivia 1, Canada 2, Kenmark, England 1, Hongkong 6, Indonesia 7, Ireland 1, Japan 5, Korea 1, Malysia 4, Micronesia 2, Newguinea 5, New Zealand 2, Pakistan 1, Palau 1, Parayguay 2, Philippines 500, Saipan 3, Saudi Arabia 1, Singapor4 2, Swaziland 4, Taiwan 4, Thailand 5, UA Emirates 3, USA10, Zambia 2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988-1990 Filipino Missionary Directory).

164개의 언어족 중에 134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31개는 신 약만 50개가 쪽복음 만 번역된 상태이다.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1974년 통계로 신학교 74개이던 것이 91년통계로 210개의 교회 혹은 기관이 신학교 혹은 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다. 신학교육도 주로 서양의 시상 을 번 역하여 가르치는 단계에 있으며 많은 학교들이 지역여건을 고 려하여 신학연장교육 (TEE)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문서전도기관도 63군데나 등록되어 있고 이들이 도서를 펴내고 전도지를 개발하며 교육자료, 성경공부안, 기타 신앙지를 만들고 있다. 기독교방 송과 텔 레비젼 방송국이 있어 방송을 통한 전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7)가톨릭 선교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주후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원주민들 가운데 대다수가 신앙 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된 섬은 필리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운시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고등 신앙(higher faiths)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슬람교 만이 아 시아 대륙에서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이 세워진 곳에서 기독교는 많은 진척을 보이지 않 았다. 필리핀에서 회교가 기독 교보다 앞섰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보르네오로부터 모슬램 상인들이 먼저 화서 그들의 신앙을 가 르치고 있었다. 이슬람이 1세기 또는 2세기를 앞질렀기 때분에 필리 핀 섬들이 기독교화되기보다 이슬람화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때에 맞게 도착했다.

물론 남쪽에 많은 모슬렘 교도들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몇년 후인 1573년에 큰 북쪽 섬인 루손섬의 운주민들 중 얼마는 (특히 해안쪽) 모슬렘교도였다. 남쪽에 흩어 진 모슬렘교도들이 부분적으로 민다나오의 통치자와 교 전이 있은 후 부분적으로 이슬람 의 전도가 금지되었고, 이슬람교도 들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만이 허락되 었다. 북쪽에서 는 기독교가 이슬람이 발판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필리핀이 기독교화되었던 요인은 구미와의 접촉 때문이었다. 뚜렷 한 영향을 준 나라는 영향을 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8세 기까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공 격적이며 포르투칼과 네덜란 드보다 어 힘이 강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필 리핀은 거 의가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 스페인의 선교사가 동남아시아에서 다 른 지역 보다 필리핀에서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목 적은 상업이 었고 기독교 신앙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에서 상업보다 선교가 더 꾸렷했고 정치적 정복보다 기독교 전파가 앞섰다. 필리핀은 아 시아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 은 더 맣은 기독교인들을 얻었으며 선 교사들이 동인도와 인도 차이 나,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갔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페 인의 정치적 종교적 정복을 위한 전략지로 생각되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활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 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한달 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 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 (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 가 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스페인 사람 들이 필리핀 회심자 들을 얻은 것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마젤란과 빌라로보스에 의한 필리핀 회심자들이 생겨나긴 했으나 정치적 정복 처럼 영구 적인 기독교를 심은 것은 레가스피에 의해서였다. 레가스피 의 지시에 의하면, 모든 탐 험가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행동해야 하 며, 주님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공경해야 하 며, 원주민들을 잘 대 우해야 하며, 종을 사고 파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했다.

레가스피와 함께 5명의 어거스틴 수도승들이 왔으나 그 중에 3명 만이 필리핀 섬에 남 았다. 어거스틴 교단에 이어서 1577년에 프란시 스교단이 도착했으며, 1578년에 도미니 크 교단이 교황의 명령으로 마 닐라에 주교구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으며, 이러서 제수잇 교단 이 들어왔다. 이들은 점유한 후 1세기 동안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정 복의 결합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필리핀 회심자들을 얻는 데 성공 케 했다.

기독교는 필리핀 사회에 많은 일을 했으며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72%가 아시아에서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 국가로 만든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스페인의 필 립 2세에 의해 식민정책의 주요목적으로 신앙을 전파 하게 하여 교회, 병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원주민 성직자들을 훈련시 켰다. 처음 필리핀 감독 조르게 바르린(Jorge Barlin)이 생겨난 후로 1905년까지 주교감독이 생기지 않았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로 부터 북쪽으로 퍼질 때 가톨릭이 이슬람의 전진을 막는 역할을 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수년 동안 산속으로 쫓겨난 일백만 정도 의 부족들과 이방인들 이 있다. 또한 민다나오(Mindanao) 남쪽섬에 주로 모여 사는 모로스(Moros)라 불리는 2 백만의 모슬렘교도들이 있 다. 마닐라에 30만의 중국인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들 가운데 주로 종 교적으로 불교인, 문화적으로 유교인들이 있다.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아글리파안 교 회(Aglipayan Church)교회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 지도자 그레고리 오 아글리피아(Gregorio Aglipay)가 로마에 반대하여 독립 국가적인 가톨릭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2년에 형성되 었다. 수년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유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회에서의 분열을 가져왔다.

1948년 이래로 필리핀 독립 교회 의 세 감독들이 미국인 대주교의 손에 성별식을 받았 을 때 두 교파 가 협력하여 일했다. 케손시에 있는 성 안드루 신학교(St.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지금 연합기구이며 두 교파 간치 성직자들 을 훈련시키고 있 다. 1961년 이후로 그들 사이에 친밀한 교섭이 있었 다. 필리핀 독립 교회는 150만 이 상의 회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안에 약 40명의 감독들을 가지고 있다.

 

(8)개신교 선교

미국으로부터 개신교 선교협회들이 쇄도하여 들어왔다. 그 첫번째 가 미국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였다. 장로교 개 척선교사는 18994월에 도착한 제임스 로저스 박사(Dr. James B.Rodgers)였다. 두마케티시에 있는 유명한 실리만 대학 교(Silliman University in Cumaguete city)1901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창설되 었다.

처음부터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조장했다. 1907년에 그들은 마닐라에 연합 신 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 기 위해 감리교인들과 손을 잡았다. 1992년 에 그들은 연합복음주의교 회(United Evangelical Church)를 형성하기 위해 회중교인 들과 연합 형제회들과 통합했다. 1947년에 교회와 선교가 통합했으며 그 후 선 교사들 은 형제의 일꾼들로서 교회에서 봉사했다.

1948년 이후는 장로 교인들의 일이 필리핀 연합교회를(United Church of Chirst in the Philippines)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왔다. 지난 10년 동안 우호적인 일꾼들의 수 가 감소했다. 대략 1/3이 교회일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의 료와 교육과 행정 일에 머물 렀다.

필리핀에 들어간 두번째 선교회는 감리교 성공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감 독 제임스 써번(Bishop James M. Thoburn)1899년에 마닐라를 방문하여 필리핀 섬 들에서 사역을 의 논했다. 처음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기의 회심자인 니콜라스 자 모라 목사가 일을 수행한다. 처음 선교사들은 19002월에 마닐라에 도착 한 WFMS에 소속한 5명의 여자들이었다.

한 달 후 토마스 마틴 목사가 도착했고 이어서 후에 감독이 된 호머 스텐츠(Dr.Homer C.Stuntz)박사가 일을 수행했다. 여성들을 위한 첫 성경학교가 위니 프 레드스폴딩 양 (Miss Winifred Spaulding)에 의해 열렸다. 첫선교 회의는 1905년에 조직되었고 1908 년에 정기회의를 가졌다. 감리교 성 공회는 세 번(1905, 1909, 1933)이나 갈라졌다. 첫 필리핀 감독이 1944년에 임명되었다.

오늘날 감리교회는 5개 연회로 조직되었고 모 든 주요 직위들은 필리핀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협 력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52년까지 필리핀 연합교회의 문제로 감리교회의 사역이 북루손섬에 한정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교회와 선교 일이 민다 나오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s)1900년에 현지에 도착하여 파나 니(Panay)와 네그 로스(Negros)섬들에 노력을 집중했다. 에릭 룬트박 사(Dr.Eric Lund), 스위스 침례교 선 교사는 미국 침례교 외국인선교 사협회의 처음 대표자였다. 그와 그의 동료 브라우리오 마니칸 (Braulio Manican)1912년 파나이어와 비사얀어 성경번역을 마쳤 다.

첫 선교 병원이 안드루 홀 박사(Dr. Andrew Hall)에 의해일루일 루(Iloilo)에서 열렸다. 1905년 미스 안나 쟌슨(Miss Anna Johnson)은 침례교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웠다. 필 리핀 침례교회 협의회는 1935년 에 형성되었는데 세례 교인 3만을 가진 교회로 300여 교회가 있다. 다음은 1901년에 생긴 그리스도의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있다.

그들은 마닐라를 피하여 북 루손으로 갔으며 라오악 (Laoag)에 본부를 세웠다. 1901년 과 1954년 사이에 이 선교회의 70명 의 선교사들이 이 섬에서 사역했다. 1943년에 그 리스도의 교회는 복 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형제회(United Brethren)와 통합 했 다. 이들은 후에 필리핀 연합교회가 1948년에 조직될 때 가장 큰 연 합회원이 된 교 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외국선교를 위한 미국인 이사회는 일치에 의해 민다나오 남쪽섬으로 할당되었 다. 그 당시 50%가 명목상 가톨릭교도였고 30% 가 모슬렘교도였으며 나머지는 이방인 이었다.

개척 선교사인 블랙 목사 부부(Rev.and Mrs.R.F.Black)는 다바오 (Davao)에 위치했다. 회중교회는 연합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1929년에 장로교회와 연합형제교회와 통합했다. 1948년에 새로 형성 된 필리핀 연합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Mission)1902년에 일을 시작했 다. 이들은 항상 마닐라에 있는 영미 사회에 중요한 사역을 계속해 왔다. 또한 루손 산간지역의 이고롯 쪽 (Igorots)과 남쪽 민다나오의 원 주민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쳤다. 성 안드루 신학 교와 트리니티 대 학이 필리핀 독립교회와 지금 손을 잡고 일하고 있다. 필리핀 성공회 는 거의 6만명에 이르는 세례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1902년에 민 다나오 남부섬에 서 일했으며 여러 달 후에 선교사가 콜레라로 죽자 일을 보류하기도 했다. 수년 후인 1908 년에 일을 시작하여 2커플을 얻었고 1941년에는 30명의 사역자를 얻었고 1947 년에는 필리핀 기독 교선교연맹이 독립하게 되었다. 1969년에는 558명의 회원들을 얻 었다. 세례교인은 2만을 확보했다.

여러 수준에서 기독교인 훈련을 하 는 4개의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2백 만장 이상의 복문서를 정기적으로 찍어내는 연합출판사를 만들었다. 또 한 라디오 방송도 민다나오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사역중 하 나이다. 1958년에 시 작된 좋은 소식시간(Good News Time)22주간 방송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에 4개의 상업방송과 하나의 교회와 관계 된 방송을 가지고 있다.

제칠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1910년에 필리핀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여러 곳에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174개의 국 민학교, 20개의 고등학교, 2개 대학과 6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다. 교 회 개척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125,000명의 회 원을 모았고 1,165개 정도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는 미국에서 회심하여 미 국 성경학교에서 훈련 받았던 필리핀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 정을 가지고 1930년에 필 리핀에 돌아와 하나님의 성회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이들 중 몇몇은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하나님의 성회는 복음 전도와 교 회개척에 열심이다.

오늘까지 각 지역에 6개의 성경학교를 세웠고 1964년에 극동신학교(Far East School of Theology)를 마닐 라에 세웠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연장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현재 425교회에 5만의 세례교인을 확보했으며 700명의 자 국인 사역자들과 45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 UCCP)1948년에 연합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세 개의 교파가 통합 을 했다. 이 교파들은 연합복음주의교회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 United Evangelical Church)복음주의교회(연합형제교회와 그리 스도의 제자교회 : Evangelical Church), 필리핀 감리교회(독립교회 : Philippine Methodist Church)였다. 다섯 개의 미국인 교파들이 연합 교회와 협력했다(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연합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개혁교회, 연합그리스도교회).

이들 교회에서 연합교회에 70여명의 선 교 사역자들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선교 부는 교육, 의료, 행 정사역에도 해마다 협력을 해왔다. 해마다 4-5%의 성장률을 가지 고 도 엽합교회는 1,400명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신학교 훈련사역을 후원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400명만이 목사로 임명되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는 160.000명의 세례교인 을 가진 분명히 필리핀에서 가장 큰 개 신교회가 되었다. 연합교회는 성경학교, 학원, 중 소 대학, 간호학교, 두 신학교와 실리만 대학 등 2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선교현장에서 그렇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독교 대학이 별로 없 다. 1907년에 장로교 인에 의해 세워진 두마케티시(Dumaguete)에 있 는 실리만 대학(Silliman University) 교는 필리핀에서 내놓을 만한 대 학이다. 207명의 교수진과 3,500명의 등록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실리 만 대학은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는 에큐메니칼에 속한 대학교 이다. 필리핀중앙대학(Centeral Philippine University)은 미국 침례교회와 관계가 있는 데 1905년에 일루일루(Iloilo)에서 시작 되었다. 1953년에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받은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 로 10개의 중소 대학교로 구성되었으며 한 개의 신학교를 가 지고 있 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선교 단체들이 일어났다. 이 선교단체들은 미개한 부족들에게 더 많은 선교를 집중하고 있는 선교단체들이다. 남침례교선교회는 1948년에 마닐라에 있는 전중국선교사들로 말미암 아 시작되었다. 빠르게 성장하여 북쪽에 루손섬과 남쪽 에 민다나오섬 과 중앙에 시부섬에 현재 1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이미 145 개 의 교회를 개척했고 그중 130개의 교회가 자립하고 있다. 세례교인 이 13,000명에 이 르고 있다.

해외선교사협의회(Over Missionary Fellowship)1952년에 민도 로섬(Mindoro)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며 그 당시까지 거주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하나도 었었다. 오늘날 선교 사의 정반이 부족들이 사는 산 간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 중에 약 30,000명에 이 르는 망얀 (Mangyan)지역에 사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6개의 주요 부족들에 게 선교 를 하고 있다. 문서선교를 통하여 필리핀 교회들에게 큰 공헌 을 하고 있는 선교 단체 이다.

위클리프 성경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선교회는 피트만 박 사(Dr. Richard Pittman)의 인솔로 22명의 성경번역자들이 1953년에 필리핀에서 도착함으로 시작되었 다. 1970년에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42부족들 가운데서 일했다. 성경의 부분들이 23 개의 언어로 번역 되 었다. 이방인 부족들도 관심을 가졌으며 모슬렘족에게까지 사역이 확 대되었다. 번역자들은 직접전도를 하지 않았으나 현재 36부족 가운데 신앙인들이 생 겼다.

또한 필리핀의 원시 부족들 가운데 일하고 있는 새부족선교회( New Tribes Mission) 는 현재 6부족에 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9)오늘의 민속신앙

1521년 마젤란이 와서 로마 가톨릭을 전파하지 전 필리핀에 존재 했던 종교는 전령숭 배 신앙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필 리핀의 역사는 거의 알 길이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 그들의 종교는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

1521년 마젤란이 시부에 도착한 일주일 후 시부의 왕과 여왕과 그 백성 전체에게 세례 를 베풀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은 필리핀 사람의 전통과 민속을 로마 가톨릭과 대치 되지 않는다고 믿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스페인 신부들은 세례를 베풀 때 일부일처의 결혼과 과거의 죄로부터 회개, 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신앙을 조건으로 했으며, 이 외에도 아베마리아, 십계명, 주기도문 등의 제도를 덧붙였다.

교회는 로마 가톨릭 종교를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곳이 되었고 반면에 가정은 엥 정령숭배의 종 료를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정령신앙은 실제적인 매일의 생활 즉 농사, 사냥 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은 궁극적 관심 즉 신에 더욱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의 식민지화는 성공했으나 로마가 톨릭 신부들은 현재의 종교가 실제의 로마 가톨릭이 아닌 혼합된 종 교 즉 민속 가톨릭이 되었음을 깨 달았다. 민속 가톨릭은 로마 가톨릭 의 모습을 가진 정령신앙일 뿐이다.

민속종교는 같은 사람 안에 일치하지 않는 두 개의 종교를 가진 종교이다. 로마 가톨릭 은 궁극적 관심을 다루고 정령신앙은 매일의 생활의 관심을 다루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다른 삶의 영역을 가진 생 각과 행동이 분리된 결과를 가져왔다. 가톨릭은 구원을 위해 세계를 가프쳤고 필리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세례를 받는 명목상의 신자가 되었 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중심에 정령신앙이 남아 있다.

그러나 관심의 분야에 있어 차이점이 있으나 로마 가톨릭과 정령 신앙이 겹치는 분야가 잇다-예배와 축복을 위해 종교적인 우상이나 물건들을 사용, 성수 사용과 성인들에게 기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에 정령신앙의 부적과 같은 능력을 부여, 종려주일에 축복 이 부여된 십자가 형상으로 만든 종려 잎사귀들이 집 문위에 놓여질 때 악령들 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푸니와 버 스, 택시 등에 그들의 여행을 지켜준다는 신앙을 가진 동 정녀 마리아 나 싼토 니뇨(Santo Nino)의 형상의 제단을 가지고 있다. 시부의 뀌 아포 의 검은 나사렛사람(The Black Nazarene of Quiapo)과 싼토니뇨 (Santo Nino)는 병 든 자를 고치고 악한 영들에게서 지킬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종교적 상 들이다. 싼토 니뇨의 집인 시부시 에서 싼토 니뇨의 호의와 관심을 얻기 위해 늙은 여 인들이 피트 쎄 뇨(Pit Senor)라는 춤을 춘다.

이 여인들은 고객들이 사준 초들을 가 지고 교회 앞에서 춤을 춘다. 이 초들은 싼토 니 뇨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1월에 전국에서 모인 수천 명 의 사람들이 시부의 싼토 니뇨를 기념하여 춤을 춘다. 겹치는 또 한 가지는 연옥설 로서 사람의 영혼이 죽은 후에 계속해 서 나타난다는 정령신앙과 일치한다.

그 예로 위령의 날(All Soul's Day)에 죽은 자의 무덤에 음식을 놓아두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무 덤에서 죽은 조상들과 함께 하루종일 또는 온 밤을 지내기도 한다.

 

3) 주요언어: 영어 및 Tagalog

 

4) 기 후: 연평균 기온 : 26-27

12~ 2: 초가을 날씨, 시원 쾌적 3~ 6: 건기 (필리핀의 여름) 7~ 11: 우기 (우리나라 장마철과는 달리 가끔 비가 오는 정도)

열대지역임에 불구 항상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영향으로 기온의 이상고온이 없으 며 습도도 높지 않으며 항상 시원하고 쾌적한 기온이 유지되는 것이 특징임.

태풍, 지진, 화산폭발등 재해가 발생하는데, 태풍은 주로 5 - 11월 사이에 필리핀 남 동부에서 발생한다. 필리핀에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12월에서 5월 사이이다.

 

5) 역사 / 외세지배:

* 스페인 통치이전

AD1500 까지 3차례에 걸친 말레이인들의 대량이주,농업 경작. 공동체마을 "바랑 가이"형성 - 현재 필리핀 행정구역의 기본 단위

* 스페인 통치시대(15711898)

1521년 스페인의 마젤란상륙 시기부터 1898년 미국에 양도 될 시기까지이며 당시 바랑가이 6000개이상 존재 (1바랑가이 = 100가구) 오늘날 필리핀 이름 유래는 당시 스페인 국왕 필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피나스 즉 '필립의 땅'이라고 칭함. 1571년에 수도를 마닐라로 지정,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하여 아시아 유일의 카 톨릭 국가화를 시킴

1898.6.12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미국의 통치시대(18981946)

1898년 미-스전쟁에서 승리 후 스페인에게 2천만달러를 지불 하고 필리핀을 양도 함. 정치, 경제, 사회, 교육전반에 걸친 문화적 침투 - 영어 공용화. 스페인 통치시 대와 달리 필리핀 경제발전에 투자 - 도로, 학교, 공중위생, 화폐개혁, 공장건설 이외 필리핀인의 중앙정부 진출 개방 1935년 필리핀공화국의 헌법구성을 하였으나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아니었음 1941122차 세계대전 발발 -일본군의 침공

1946.7.4 미국으로부터 독립

* 일본의 통치시대 (19421945)

194112월부터 19441020일 맥아더장군의 'Leyte'상륙 작전 성공시까지.

독립국가 시대

1945년 총선거 실시, 필리핀공화국 탄생 194674일 로하스 필리핀공화국 초 대 대통령 취임 독립 후에도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지속.

 

6) 교통수단

* 지프니(Jeepney)
필리핀 서민의 기본적인 교통수단으로 군용 지프 모양을 한 승합차로 통상 15~20 명 이상 승차한다. 기본요금은 4페소 이며,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진다.

* 트라이시클
모터 싸이클을 개조해서 승객 5명을 태울 수 있게 만든 대중 교통수단으로 보통 짧 은 노선을 운행한다. 기본요금은 4페소, 스페셜 요금은 통상 20페소(노선에 관계없이 손님 이 원하는 곳 까지 운행)

* 택시
일반 에어콘 택시 : 기본요금 20페소 이며 250m 마다 1페소씩 추가됨
메트로 택시
: 승합 에어컨 택시로 운행 구간이 버스처럼 정해져 있으며, 기본 요금 은 10페소, 종점에서 종점까지가 20페소 이다. 운전수 포함 11인승이다.

* 버스
에어콘버스 :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며, 냉방이 무척 잘 된다. 기본요금은 7페소이며,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름
일반버스 : 냉방이 안되며 비교적 상태가 좋지 못함. 기본요금은 4페소이며,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름

* 바이시클
자전거를 개조해서 만든 교통수단으로 주로 골목이나 시장 주변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 나른다. 기본요금은 4페소 이

* 칼레사
마차를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 차이나타운이나 인트라무로스등지에서 볼 수 있는 관 광객용 교통수단으로 정해진 요금이 없다. 다소 비싸편이며,보통 50~100페소이다.

* 고가 경전철(LRT, MRT)
현재 필리핀에는 기존 경전철뿐만 아니라 메트로 마닐라 전 지역을커버하는 MRT 라는 경전철을 국책사업으로 공사 중에 있으며, 일부 구간은 운행중에 있다.
LRT-기본요금은 10페소 이며 거리에 따라 요금이 동.
MRT-기본 14~20페소까지.